'장식은 범죄다'라는 아돌프 로스(오스트리아)의
합리성에 근거한 과격한 표현에 문득 반감이 생겼다. 

독일의 관료제, 합리적 관념론이 유대인 대학살을 낳았다는 사실과
바우하우스의 물질에 대한 기호적 접근이 모더니즘이란 포장으로
세상의 모든 물건을 같은 모양으로 바꿔 놓았다는 끔찍한 사실을 상기하면

'장식은 범죄다'란 표현은 '장식은 미덕이다'란 표현으로 바꿔
비록 그 순간은 불합리하더라 하더라도 '다양성의 미덕'으로 장려해
이 사회가 일관된 합리성으로 점철되어 비인간화 되는 것을 우려해야 한다.

자연은 자칫 불합리해 보이는 복잡성을 띄고 있어 보이지만
그 안에 매카니즘은 엄청나게 안정되어 있으며 
개개의 요소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 이렇게 안정될 수 있는 가장 원인은
바로 다양성과 그 연결성에 있다는 점을 상식으로도 알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식은 범죄다'라는 합리적 표현은 비상식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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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igeryoonz


경향의 CI를 만드는 팀에 소속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심벌과 방향을 작업해 사내 설문을 마쳤고,
이제 경영진과 조율하여 결정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글은 CI를 시작하기 전에 경영진에 드린 글입니다.
CI를 실무적으로 진행할 팀장으로서 먼저 제 의지를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무자와 경영진의 CI, 디자인에 대한 인식차도 좁힐 필요도 있었습니다.
이 글 뒤에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팀구성 및 실무적 가이드라인의 제안이 있었지만
그 부분은 삭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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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CI를 만드는가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존경하는 그래픽디자이너 ‘폴 랜드’는 수많은 다국적 기업의 기업 심벌과 로고를 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훌륭한 CI는 훌륭한 그래픽이어서가 아니라 그 기업이 훌륭한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IBM에서 CI를 의뢰 받고 수많은 형태를 실험했지만 결국 기존의 형태에서 비례와 균형을 수정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오래되거나 진부하다고 기업의 얼굴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현재도 IBM의 CI는 최고의 그래픽디자인 사례로 회자됩니다.
현대는 기호(상징)시대이고 심벌은 회사의 기호(상징)이자 이미지입니다. 수많은 기업들이 심벌을 이미지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 지방단체, 기관, 시민단체 등도 심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심벌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건물에 다닥다닥 붙은 간판처럼 과도한 심벌의 범람은 인식을 흐리는 결과도 초래합니다. 이미 수많은 형태의 심벌이 범람하고 있기에 형태적 차별성은 의미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차별화된 심벌을 만든다고 차별화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단지 기업을 구별하는 역할만을 할 뿐입니다.
지방자치단체는 심벌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언젠가부터 지방자치단체는 자신들의 고유한 심벌과 캐릭터를 개발하고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이것은 엄청난 유행이 되었습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앞 다투어 심벌과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마구 만들어진 지방의 고유 홍보 수단인 심벌은 형형색색이고, 캐릭터는 대부분 머리와 눈이 큰 만화 같은 모습과 표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고유한 홍보 수단인 심벌과 캐릭터는 그 고유성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관계자들은 또 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것을 폐기하고 새로 차별화(?)된 심벌을 개발했습니다. 게다가 브랜드 개념이 지방자치단체에도 도입되면서 사업마다 심벌도 추가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미처 교체하지 못한 ‘기존 심벌’과 ‘새로 만들어진 심벌’, 그리고 ‘각종 사업의 브랜드 심벌’이 한 지방 내에 동시에 존재하고 엄청나게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방을 상징하는 심벌의 고유성은 상실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위안 외에는 아무런 기능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지역주민조차도 자신이 사는 지방의 심벌이나 캐릭터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무용지물이지요. 심하게 말해 쓰레기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방자치단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기업과 각종 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맛에 따라 수없이 자신들의 얼굴(심벌)을 바꿉니다. 이는 현재 한국 사회의 디자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나옵니다. 최소한 남들처럼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따라하기식 성형과 유행(트랜드) 또한 비슷한 디자인 인식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쉽게 자신의 얼굴을 버리고, 쉽게 바꿉니다.
CI는 사람으로 보면 얼굴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을 인식하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얼굴은 시간과 변화가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미지입니다. 결코 쉽게 바꿀 수 없는 가치입니다. 성공을 위해 다른 이들처럼 무작정 성형한다고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인 문제인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을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물론 화상을 입거나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에 맞는 성형은 필요합니다만 오래 유지되어 온 기존의 정체성을 이어받아 발전하기를 추구한다면 폴 랜드의 지적처럼 무작정 얼굴을 바꾸면 안 됩니다. 비례와 균형 정도만 찾으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아무 잘못 없는 얼굴을 괜히 탓하는 수도 있습니다.
심벌은 기업이나 단체의 정체성에 걸맞은 얼굴입니다. 시간과 경험이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얼굴은 그 어떤 새로운 디자인으로 대체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얼굴은 순간의 새로움 이외에는 전혀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얼굴 이미지는 신선한 형태나 새로운 시도가 아닌 시간과 노력의 산물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심벌 디자인은 다짜고짜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닌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입니다. 기존에 축적된 정체성을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과정입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이미지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상을 위한 방향을 잡는 과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바로 기업 CI입니다. 이때의 얼굴과 표정이 바로 CI입니다.


이미지 정체성 찾기
앞서 지방자치단체의 디자인 운용 실패 사례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무작정 형태 찾기에 몰두한 점입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기존 사례들을 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키워드와 버무려 만들어진 심벌과 캐릭터는 단순히 일회용 디자인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지금도 심벌 디자인 실패 사례는 넘칩니다. 수많은 기업들과 단체들이 심벌을 만들 때 자신들의 정체성 보다는 순간 눈에 보이는 형태에 몰두합니다. 형태만을 쫒아 내놓은 결과들은 취향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벌은 정체성이 주는 고귀한 상징성을 떠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입맛에 맞게 고르는 잡화점에 나열된 상품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나마 그 정체성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경우 제호에서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합니다. 그 점은 상당히 높이 살만합니다. 다양한 디자인 시도를 하고 있지만 중심은 현재의 제호입니다. 다양한 시도는 다양한 시도일 뿐입니다. 본래의 중심인 제호(얼굴)가 있기에 다양한 스타일 연출이 용인됩니다.
형태는 늘 취향을 따릅니다. 취향은 각기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저마다 다른 취향을 모두 만족시키는 보편적 형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몇몇이 타협을 통해 찾았다고 해도 그것은 지극히 단순하거나 난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몇몇의 취향일 뿐입니다. 몇몇의 취향에 근거한 형태는 기업의 상징 역할을 하기에는 그 근거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삼성과 엘지의 CI 선호도는 형태나 색깔의 취향이 아닌 기업에 대한 자신의 입장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CI의 형태는 자신을 입장을 대변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형태는 결코 입장을 바꾸지 못합니다. 형태가 주는 달콤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이 옷을 고를 때 취향보다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갖춰야 할 형식과 절차가 우선합니다. 그 형식과 절차의 제약 속에서 옷을 고릅니다. 이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옷을 고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보여 질 것인가’ 자신의 이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은 형태에 우선하고 취향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CI는 ‘이미지 정체성’을 찾는 과정입니다. 형태는 이미지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결정해 줍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늘 취향이 개입됩니다. 최대한 객관적인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개인 취향의 접근을 경계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래서 이미지 정체성은 몇몇의 취향에 의해 심벌이 만들어지는 것을 방지해 줍니다.
대기업의 경우 CI를 외국 기업에 의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성이나 엘지는 수십억원을 들여 외국기업(랜도)에 맡겼습니다. 세계적 마인드에서 자신들의 객관적인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랜도는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기업들의 많은 정보와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업의 CI를 구축하는 것은 ‘기업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랜도가 만든 삼성과 엘지의 심벌은 초기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기존의 자신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충분히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을 부여 받았습니다. 삼성은 ‘젊고 스마트한’ 엘지는 ‘따뜻한’ 이미지로 제법 자리를 잡았습니다. 8년 전 랜도에 CI를 의뢰했던 국민은행은 ‘think KB'라는 슬로건과 로고타입을 결정하고 꾸준히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통합디자인의 시작
저는 ‘경향신문’ 제호 변경에 대한 수많은 유혹을 받곤 했습니다. 저도 ‘경향신문’ 제호가 진부하다는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 동안 경향신문과 함께하면서 독자에게 각인된 ‘경향신문’ 정체성은 고스란히 이 제호에 녹아 있습니다. 쉽게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경향신문’ 제호의 로고타입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례와 균형을 수정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독자에게 익숙한 기존의 가치를 보존하려 노력했습니다. 폴 랜드가 IBM을 작업한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제가 폴 랜드가 아니기에 여전히 ‘경향신문’ 제호는 비례와 균형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전 서체(아이리스)를 그대로 써서 엉성했던 제호는 제법 로고타입의 구색을 갖추었습니다.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수정된 ‘경향신문’ 제호도 최근의 세련된 디자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한 새롭게 변화하는 매체 환경에서도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현재의 제호는 형태로만 본다면 경향신문의 상징성과 정체성을 제외하고는 형태와 활용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향’ 두 글자를 다시 디자인했습니다. 처음 적용한 것이 예전 ‘경향닷컴’ 회사 CI입니다. 그리고 최근 ‘주간경향’ 제호에 사용했습니다. 앞으로 공사 중인 경향신문사 빌딩(경향아트힐)에도 이 로고타입이 적용될 예정입니다. ‘스포츠칸’이 ‘스포츠경향’으로 바뀐다면 마찬가지로 적용할 것입니다. ‘레이디경향’도 이 로고 타입을 중심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경향신문’을 제외한 모든 매체와 환경에 쓰이는 ‘경향’은 새로 만든 로고타입으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의 ‘경향’과 ‘주간경향’의 ‘경향’은 상당히 다른 느낌의 로고타입니다. 새로 만든 로고타입에는 아직 어떤 느낌도 정체성도 없습니다. ‘경향신문’ 제호와 달리 그 어떤 정체성도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져 자라나는 ‘경향’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해야할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앞으로 통합적 디자인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새로 만들어진 ‘경향’ 로고타입은 형태적 측면이나 취향을 떠나 꾸준히 사용하고 노출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실
그리고 제 앞에 새로운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경향신문을 대표하는 ‘심벌’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조금은 엉뚱한 측면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우리는 이미 기존 ‘경향신문’의 제호와 새로 만들어진 ‘경향’ 두 가지의 ‘경향’ 로고타입에 경향의 정체성을 담아야할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향신문’의 ‘경향’은 진부합니다. 새로 만들어진 ‘경향’ 또한 글자의 특성상 형태가 복잡한 측면이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아이콘 등으로 활용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상징하는 또 다른 심벌을 만들어야 합니다.
심벌의 경우는 심벌자체만 제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심벌과 로고타입(글자)은 같이 디자인됩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로고타입이 있기 때문에 새로 제작되는 심벌은 기존의 ‘경향’ 로고타입과 어울려야 합니다. 또 경향의 정체성도 찾아 반영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전혀 엉뚱한 또 하나의 우리 이미지를 만들어놓고 우왕좌왕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큰 틀에서 우리의 이미지를 통합하는 디자인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각종 매체에 전혀 다른 이미지인 ‘경향신문’ ‘스포츠칸’ ‘주간경향’ ‘레이디경향’이 있습니다. 더불어 ‘크로스’ ‘경향리크스’도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새 이미지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새 이미지는 기존에 전혀 다른 전략으로 시장에서 자리 잡은 나머지 경향 매체들의 이미지들을 통합하려고 합니다. 굴어들어 온 돌이 기존의 돌을 위협하는 상황입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심벌이 어떤 형태가 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너무나 다른 정체성과 이미지를 구축한 기존의 제호 디자인들과 각종 브랜드를 묶을 수 있는 통합 심벌을 만든다는 것이 상상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새로운 매체 환경에 적용할 심벌을 만들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시작하지만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가 우리의 이미지를 정리하는 첫 시도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고 언젠가는 닥칠 일입니다. 이번 논의가 단순히 심벌을 만드는 것이 아닌 통합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는 의견을 나누고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어떻게
어쨌든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할 여건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기존 상황보다는 나아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상황을 기반으로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방향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
1. 조사단계
1) 디자인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매체와 사업들의 디자인을 풀어놓고 총체적으로 경향신문의 디자인 현실을 진단해야 합니다. 문제점을 파악하면서 가야 할 방향이 나올 것입니다.

2) 롤모델을 찾아야 합니다(사례분석)
기존 외국, 한국에 있는 언론들의 심벌과 제호의 운용현황을 파악하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받을 수도 있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정체성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언급했습니다. 내부인사 외부인사들에게 경향이 어떤 이미지인지 어떤 이미지였으면 좋겠는지 알아보는 것은 이번 프로젝트 진행에 큰 틀의 방향성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경향이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4) 슬로건이 필요합니다
조사단계의 최종단계는 ‘슬로건’을 뽑는 것입니다.
‘슬로건’은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최종 정리입니다.
그리고 슬로건을 뽑는 과정에서 나왔던 ‘키워드’들이 디자인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KB 국민은행’이 외국의 랜도에 CI를 의뢰하여 받은 슬로건이 ‘think KB'입니다.
슬로건인 ‘think' 국민은행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받은 것이고 슬로건 아래 모든 마케팅과 디자인, 심벌이 진행되었습니다.

+
2. 제작단계
1) 슬로건을 기반으로 ‘색’과 ‘형태’와 ‘전용서체’가 결정됩니다.
2) 본격적인 ‘심벌’ 제작 작업이 진행됩니다.
3) ‘심벌’을 기존 디자인과 어울리도록 변형하거나 적용해야합니다.
  (애초에 이것을 염두하고 동시에 진행해야 합니다.)

3. 활용(적용)과 홍보
1) 적용 방향에 근거해서 경향에서 나오는 모든 디자인과 매체의 적용 범위를 정합니다.
2) 기타 홍보와 활용은 좀 더 논의해 봐야 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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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
공모전을 활용한다면 저작권과 관련한 기존의 폐해는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경향신문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앞서 설명한 상황을 본다면 공모전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기대를 할 수 없습니다. 입맛에 맞거나 좋은 형태는 발견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에 공모전으로 채택된 아이디어는 맘에 안 들면 금방 폐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공모전을 이용한 심벌 제작은 앞서 말씀드린 형태적 접근일 뿐입니다.
공모전은 홍보 방법이나 아이디어를 얻기에는 좋을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심벌을 만드는 과정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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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igeryoonz


어울림 산조Oullim Syncacophony _ 도올 김용옥


1. 신은 이 우주를 디자인한다. 그러나 신은 이 우주의 디자이너가 아니다. 신을 "디자이너"라는 명사적 실체로서 파악하는 모든 이해방식이 대부분의 서양종교전통의 미신적 유치성의 본원을 형성한다. 신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그는 단지 디자인하고 있는 어떤 부사적 상태이다. 신은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기의 양태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양태란 구체성의 형식이다.

2. 이 우주에 관한 궁극적 사실은 우주가 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존재를 기라는 현실태와의 관련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기가 아닌 존재는 없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고나 언어도 모두 기에서 현현하는 것이다. 기 이외의 초월적인 계기의 도입이 없이 기 자체만으로 우주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곧 나의 기철학이다. 우주는 우주 그 자체만으로 내재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선진철학자先秦哲學者들로부터 우리나라 조선조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통된 생각의 기저였다.

3. 우주는 우요 주다. 우는 공간이요, 주는 시간이다. 우와 주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우라는 공간과 주라는 시간이 먼저 있고 그 속에 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주와 기는 선후를 가릴 수 없다. 그러나 시공간은 기로 인하여 현현되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체계일 따름이다.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의 취산聚散(집합과 분산)의 방식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시공간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을 따름이다. 디자인이란 기의 취산의 배열에 따른 시공간의 배열이다.

4. 기는 어울림이다. 어울림이란 이접적인 다자로부터 연접적인 일자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어울림에는 반드시 "새로움"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새로움의 요소가 없을 때는 그것은 어울림이 아닌 단순한 반복이요 지속이다.

5. 기는 시공간적 현실태임으로 시공간적 연장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고립되어 있는 아토밐한 존재가 아니며, 데카르트가 말하는 바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타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원인적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창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열려 있으며 관계의 그물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시공간적 관계속에서 교섭하는 존재이다. 그 교섭을 과거의 유생들은 취산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존재들은 기의 취산속에서 일정한 아이덴티티의 지속을 유지하는 사회들이다. 사회는 질서의 체계이다.

6. 기는 물질로서도 정신으로서도 규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이다 정신이다. 하는 개념이 이미 데카르트적 실체적 정의에 의하여 잘못 규정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기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물질적 극과 정신적 극을 동시에 구유具有(갖추고 있음)한다. 물질적 극을 백극魄極이라고 부르고 정신적극을 혼극魂極이라 부른다. 혼극은 기의 하늘이요, 백극은 기의 땅이다. 백극은 타자를 물질적으로 파지하고 혼극은 타자를 개념적으로 파지한다. 기의 혼극이 개념적으로 파지하는 대상을 우리는 리理라고 부른다. 리는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태이며 기속에 구현됨으로써만 그 존재성이 확인된다. 신은 기에서 현현되며 리를 담지하여 기에게 구현시키는 특수한 존재이다. 신이 파지하는 리야말로 기의 어울림의 창진의 요소이다. 리는 기의 리일뿐, 궁극적으로 기와 독립하여 고존孤存(홀로 존재)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리는 기의 구체성의 형식으로서 무제약적인 가능태이다. 어울림이란 기가 다양한 리의 구체성의 형식을 선택하는 일련의 결정에 의하여 구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이다. 리는 주어主語적인 것이 아니라 술어述語적인 것이다.

7. 디자인은 어울림의 모든 단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의식이후의 사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디자인은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언어적 현상의 디자인이지만, 인간의 의식은 매우 부정적인 편협한 것이며 에러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풀 한포기라는 기의 사회에 있어서, 의식은 말할 수 없어도 디자인은 말하여 질 수 있다. 디자인은 기가 리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교섭의 방식이다. 그것은 의식의 상태에까지 진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8. 디자인은 크게 자연의 디자인과 문명의 디자인으로 대별할 수 있지만, 양자는 결코 대적적인 관계에 있지도 않으며 또 이원적으로 나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명의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디자인 속에 포섭되는 것이다. 자연의 디자인이란 "스스로 그러함"이다.

9. 개미가 집을 짓는 것이나, 사람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 모두 같은 기의 어울림의 현상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문명의 디자인은 항상 의식과 언어라는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그 에러의 폭이 크다. 어울림이 고도화될수록 "스스로 그러함"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시행착오의 폭이 커진다. 그러나 문명의 에로스도 궁극적으로 자연의 에로스속에 들어있다.

10. 라이트나 설리반이 말하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의 오류적 성격은 형태가 기능에 종속된다는 주장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형태가 기능에 따른다는 생각은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정당하다. 자연에 있어서는 스스로 그러한 기능을 형태가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는 기의 사회의 내재적기능의 외적표현에 불과하다. 형태와 기능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인 출입관계에 있다. 그것은 동시적으로 호상적으로 교섭한다. 스스로 그러한 것은 조작하지 않으며, 장식하지 않으며, 꾸미지 않는다. 자연의 기능은 장식하지 않는다. 기능주의가 인위적 장식을 거부한다는 측면에서 그 보편적 의미가 존중되어야 한다.

11. 기능주의의 오류는 선존적先存的 주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과연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그 기능의 내용 규정에 따라 그 오류성이 드러날 뿐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는 모든 고전적의적 형태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가히 혁명적이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주장은 기능에서 심미성과 생명성을 탈색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산업주의적 획일성이 20세기 부르죠아-프로레타리아적 혁명의 역사를 물들이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인 것이 었다. 바우하우스적인 기능주의는 기능을 기계적인 것으로, 조작적인 것으로, 획일적인 것으로, 편의주의적인 것으로 대량복제적인 것으로 해석해 나갔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지를 막론하고 아직도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의 본질을 충분히 구현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면서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의 극복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열쇠라고 생각하는 매우 유치한 생각에 사로잡혀 신설을 마구 날조한다. 기능은 부사적이다. 형태는 명사적이다. 명사가 부사에 종속한다는 것은 부사가 수식하는 동사적 행위 그 자체만의 존속을 의미한다. 이렇게되면 기능주의는 매우 본질적인 해체주의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 형태라는 모든 명사는 해체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2. 바우하우스의 원죄는 기능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주의의 해석에 있다. 기능이 형태에 우선한다는 기능주의는 체體는 오로지 용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는 신유학의 발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體가 오직 用의 동일성의 체계속에 존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불교 삼법인의 일반원리와도 상통한다. 기능주의의 근원적 해석은 징여문과 생멸문이 일심법의 양측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논의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적 기능주의의 오석誤釋(잘못된 해석)은 기능을 실체에 종속되는 획일적 속성으로 간주한데에 있다. 기능을 비생명적 기계적·조작적 기능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무차별적인 국제주의로 확대 해석한데에 모더니즘의 오류가 존한다. 획일과 무차별은 죽음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이 세상에 존재(存在)하는 모든 사물(事物)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는 생각)

13. 기능은 생명이다. 기능은 생명의 스스로 그러함이다. 기능은 기의 어울림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기능은 디자인이다. 기능은 디자인하고 디자인되어진다. 기능은 신적神的이다. 기능은 기와 리를 매개한다. 기의 기능은 리를 기로 진입시킨다. 기능은 협애한 목적성의 기계적 속성이 아니다. 기능은 생명의 만족을 달성시키는 과정이다. 기능은 어떠한 경우에도 심미적 텔로스를 배제할 수 없다. 기능은 아름다워질려고 노력한다. 기능은 삶의 질서이다. 기능이 진정으로 생명적일 때, 그것은 장식하지 않는다. 조작하지 않는다. 나뭇잎파리 하나의 기능도 불필요한 장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다!

14. 아름다움은 체험의 요소간에 호상적 적응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적응이라는 것은 반드시 목적을 전제로 한다. 이 목적은 소극적 차원에서는 체험의 요소간의 배타의 결여를 의미한다. 그리고 적극적 차원에서는 체험의 요소간의 부조화를 극복하는 새로운 대비의 도입이다. 그러나 배타가 완전히 배제된 美는 죽음으로 가는 완성이다. 심미적 파괴는 심미적 건설의 끊임없는 계기이다. 삶이란 기의 어울림간의 배타의 정도가 조화의 정도보다 억제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배타와 조화는 역동적 관계에 있다. 아름다움은 완전을 지향하지만 완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成의 순간은 곧 패敗이다. 모든 완성은 부패다. 그러므로 더 높은 이상을 향한 불완전은 완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다.

15. 선善에 대한 악惡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惡(악)은 惡(오)의 느낌일 뿐이며, 그것은 부조화의 느낌일 뿐이다. 악은 추醜일 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의 한 계기일 뿐이다. 모든 윤리적 가치는 심미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윤리적 선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이 우주는 윤리적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아름다워 지려고 노력한다. 아름다움이 배제된다면, 진리도 좋고 나쁨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진리는 오로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진리가 없으면 아름다움은 저차원적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진리는 사소할 수밖에 없다. 진·선·미, 이 문명의 3대요소 중에서 선은 모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모험은 조화에 대한 부조화의 도입이다. 부조화는 새로운 조화의 계기이다. 모든 완성은 유한하다. 유한하기 때문에 완전이 가능할 수 있다. 완전의 달성은 곧 그 완전이 새로운 불완전의 한 계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은 끊임없는 과정속에 있는 일시적 상태일 뿐이다. 완전은 아름다움의 포용적 단계에 따라 하이어라키칼하다. 저등한 완전이 있는가 하면 고등한 완전이 있다. 고등한 형태를 지향하는 불완전은 저등한 완전보다 더 고등하다. 진보는 부조화의 느낌의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자유라는 것은 단지 부조화를 생산키 위한 방편이다. 완전은 끊임없이 완전을 넘어선다.

16. 그래픽 디자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표현인 문자의 형태의 디자인이라는 협애한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활판과 종이의 상관관계로 성립하는 인쇄술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개념의 문제점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소외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쇄매체의 변화, 그리고 삶의 양식의 변화에 따른 시각전달매체의 다양한 발달, 그리고 최근의 디지털혁명은 그래픽디자인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래픽디자인은 우리의 시지각을 중심으로 한 정보의 세계에 관한 디자인의 총체적 개념으로 발전 하였다.

17. 그러나 시각디자인, 시각전달디자인이라는 개념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다. 눈은 보지 않는다. 눈이라는 기관이 인체에서 분리될 때 "본다"는 행위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본다"라는 행위는 시지각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눈은 망막에 피사체를 비추는 장치에 불과하다. 망막에 떠오른 영상을 "본다"라는 우리의 행위로서 해석해내는 과정에는 우리 몸 전체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말한다. 시각디자인은 결국 몸각디자인이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 아닌 호모 모미엔스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시각디자인은 결국 몸의 느낌의 디자인이며, 그것은 몸의 느낌의 추상성과 부정성에 관한 논의인 것이다.

18. 시각은 몸각의 일부적 현상에 대한 방편적 설정이다. 시각은 인간의 의식작용에 있어서 가장 생생하며 직접적이며 분별적이지만 가장 에러의 가능성이 높은 것이며 따라서 가장 저급한 의식이다. 불교의 유식사상에 있어서는 안식眼識(식견)은 제1식第一識에 속하는 것이며, 제8식第八識인 아라야식에까지 이르는 첫관문으로 설정된 것이다. 제1식에서 제 8식까지 이르는 과정은 허감(虛感)에서 실감(實感)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시각의 특성은 대상의 현재적 로커스를 상징적으로 구성하는 능력에 있다. 모든 현재적 느낌의 상정은 인과적 관계가 아니며 상징적 관계이다. 인과적 관계로 지각되는 것은 실감이다. 그러나 실감은 모호하며 막대하며 무분별적이다. 그러한 실감을 허감으로 구성해내는 과정이 곧 상징작용이다.

19. 상징은 고도의 추상성과 부정성의 산물이다. 그것은 의식의 긍정-부정의 대비적 성격에서 산출되는 것이다. 긍정은 주어적 세계에 관한 것이며, 부정은 술어적 세계에 관한 것이다.

20. 디자인에 있어서 대비의 과도한 강조는 인간의 의식을 협애한 추상성으로만 몰고 가며 결국 에러의 가능성만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에러는 문명의 진보의 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진創進(창조하여 나아감)을 전제로 하지 않는 에러는 문명의 퇴락을 초래한다. 비쥬얼 쇼크의 지나친 강조는 비쥬얼 쇼크의 무의미성을 초래할 뿐이다. 쇼크의 상징성 그 자체가 무화되어버리는 것이다. 대비는 본질적으로 유니티를 전제로 한 것이며, 그것은 양립불가능성의 반대일 뿐이다. 유니티는 어울림이다.

21.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오류적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가 바른 진술일 것이다. 나의 생각이나 지식은 나의 존재로부터 현현되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기의 어울림이다. 이 어울림간의 대비의 심화의 최종적 산물이 의식일 뿐이다. 인간의 언어는 의식의 산물이다. 그러나 언어는 명제를 상징하는 것이다. 명제는 인간의식 이전의 사태며 그것은 진·위의 대상이 아니다. 명제의 일차적 기능은 느낌의 유발이다. 그것은 사실과의 대응 이전의 순수한 느낌이다. 이 느낌에는 기와 리가 混在되어 있다. 기는 주부와 관계하고 리는 술부와 관계하지만, 이때 리는 느낌을 유발시키는 창진創進의 가능성으로서 작용하는 것이지, 사실과의 대응에서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라는 상징체는 우리의 느낌을 유발시키며, 이 세계에 대하여 우리의 느낌을 공유시키며, 또 우리의 경험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고도의 추상과 단순화를 통하여 우리의 일상적 구체적 경험의 환경으로부터 탈출의 통로를 열어준다. 언어는 사실에 대한 굴종적인 순응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인류의 문명은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는 진보하는 문명의 산물이다.

22. 어울림은 기존하는 요소들간의 어울림이 아니다. 어울림의 가장 근원적인 뜻은 우리의 경험의 모든 요소들이 끊임없이 어울림의 과정속에 있으며 생멸生滅의 연속성에 있으며 모든 체험의 요소 그 자체가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23. 중국어는 기본적으로 단음절어이며 로고그라픽 언어이며 비굴절어이다. 한국어는 다음절이며 알파베틱 언어이며 교착어이다. 한문은 표의문자이며 한글은 표음문자다. 한문을 보통 상형문자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한문의 규정이 아니다. 한문은 상형으로부터 출발하였을지 모르지만, 허신許愼(중국학자)이 말하는 바, 지사指事·회의會意·형성形聲·가차假借·전주轉注라는 육서六書의 다양한 계통의 표현방식을 빌어 다양한 인간의 삶의 양식을 담으려 노력하였다. 현재 한자의 90%가 형성자刑聲字이다. 한문은 상형문자로서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지속되어 내려온 유일한 고언어이지만, 형성의 방식을 빌어 상형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상형의 방식은 인간의 표현의 한계를 금방 노출시킨다. 언어가 담아내고자 하는 느낌의 상징연관은 반드시 구체적 형태와의 대응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성은 어떤 의미에서 알파베틱하다. 그러므로 형성의 방식에 의하여 언어의 표음적 기능을 대치하였던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혼용하는 특이한 그라픽의 체계이다.

24. 인간의 언어생활은 비록 표음문자적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을 경우에도 상형적 요소를 결코 완벽하게 배제하지는 않는다. 변소간의 표시나 엘리베이타의 개폐의 표시, 그리고 컴퓨타화면의 여러 기호들도 상형문자로 간주될 수 있다. 상형과 표음은 인간문자의 가장 근원적 표현방식이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25. 한글은 일시적으로 창제된 문자이다. 1446년에 반포되었다. 짧은 시간안에 몇몇의 학자들이 조직적으로 연구하여 한 민족의 성음체계를 형상화한 문자가 이렇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한 민족의 언어생활을 효율적으로 담아낸 유례를 지구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인간의 무형의 소리를 유형적으로 디자인해내는 과정에 있어서 한글의 아름다움은 그 단순성과 체계성에 있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한 음절을 음운학적으로 표기하는데 "성모와 운모"라는 이분법을 썼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학자들은 성모를 초성으로 간주하고 운모를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는 3분법의 독창적인 체계를 발전시켰다.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CV), 혹은 닿소리와 홀소리(CVC)의 위상을 사각의 우주에 설정하고, 닿소리 17글자와 홀소리 11글자를 만들었다. 닿소리는 인간의 음성기관의 모양을 본뜬 것으로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으로 분류하고 오행五行의 원리와 상응시켰다. 이 닿소리의 모양의 특징은 오음에 각기 기본글자 하나를 만들고 그 글자에 획을 더해가는 방식으로 체계적인 상형의 원리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홀소리 11글자는 天·地·人 삼재三才(3가지 근원)의 원리에 따라 ㅇ(天), ━(地), ┃(人)의 기본글자를 만들고 이 세개의 기본글자를 체계적으로 조합해갔다. 이 조합된 글자들은 양성모음(밝은 홀소리),음성모음(어두운 홀소리), 중성모음(중간홀소리)으로 분류된다. 최근의 음성학적 연구의 성과는 양성모음은 후설모음으로 분류되는 체계이며, 음성모음은 전설모음으로 분류되는 체계라는 것을 밝혀준다.

26. 훈민정음은 체계적이며, 단순하며, 배우기가 지극히 용이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단순한 장형의 닿소리와 홀소리의 조합으로 다양한 인간의 발성을 모두 망라해서 형상화시킬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이며 효율적이며 능률적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천·지·인 삼재의 우주론과 음양오행의 우주원리를 매우 체계적으로 구상화시켰다. 한글은 한국인의 우주론의 가장 위대한 디자인이다. 아직 한국인의 디자인으로서는 한글처럼 웅장하고 단순하며 창조적인 업적은 없다.

27.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다시 아날로그를 목표로 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어디까지나 수단적이며 과정적이며 방편적이다. 방편의 변화가 우리 삶의 양식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아날로그적 상식에 귀속되는 것이다.

28. 디자인의 궁극적 목표는 문명을 영위하는 인간의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시간의 방향성에 역행하는 요소를 품고 있다. 역행은 엔트로피의 감소를 의미한다. 디자인은 궁극적으로 엔트로피의 감소를 그 아름다움의 본질로 삼아야 한다. 생태학적 연관의 토탈리티를 고려하지 않는 부분적인 디자인은 惡이다. 생명은 시간에 대한 반역이다. 오늘의 디자이너들은 오직 엔트로피를 효율적으로 증가시키는 짓만을 일삼고 있다. 어찌 가증스럽지 아니한가?

29. 엔트로피의 감소란 규율과 절제와 축약과 정보의 효율이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하여 공부라 이른다. 공부가 없는 디자인은 엔트로피의 증가일 뿐이며 시간의 하향일 뿐이다. 공부야 말로 생명의 본질이요, 문명의 본질이다. 문명의 디자인은 자연의 디자인을 해치지 않는 미니말리즘을 최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 이 미니말리즘이 곧 공부다.

30. 디자인은 자유로와야 하지만, 자유는 일시적 가치요 죽음의 가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유는 욕의 원초적 혼돈이다. 그 자유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새로운 공부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나 또 공부의 고착을 제어하는 것은 자유다. 자유는 창조를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제어하는 공부가 결여될 때 그 창조는 더 큰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디자인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상상력, 규율의 가치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상상력은 자유로부터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반드시 자유와 규율의 양면을 동시에 구유具有해야 하는 것이다.

31. 현실적 디자인은 부분의 디자인이지만, 그 부분은 항상 전체의 인식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체는 생명이며 아름다움이며 善이다. 전체는 곧 태극(太極)이다. 善은 아름다움으로 환원된다. 아름다움은 에로스의 중용이다. 디자인은 태극이다. 태극은 리가 기를 디자인하고 동시에 기가 리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기와 리의 상보성이 곧 태극적 디자인이다. 태극은 어울림이다. 어울림은 기와 리의 상보성이며, 세계와 신의 상보성이며, 음과 양의 상보성이며, 불협과 조화의 상보성이며, 자유와 규율의 상보성이며, 미美와 추醜의 상보성이며, 자연과 문명의 상보성이며, 형이상과 형이하의 상보성이며, 자연과 문명의 상보성이며, 도道와 기器의 상보성이다. 어울림은 중용中庸이며, 중용은 중간이 아닌, 기氣와 장場의 역동적 평형이다. 따라서 어울림에는 정체가 없으며 고착된 조화가 없으며 어떠한 일단에 치우침이 없는 영원한 과정이다. 그리고 새로움의 창조가 없는 어울림은 무의미한 타협일 뿐이다.

32. 디자이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디자인하는 자는 동시에 디자인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디자이너의 궁극적 가치는 디자인하지 않음에 있다. 디자인은 "만듦"이 아니라 "생김"이다. 저절로 생김이야말로 어울림의 최종의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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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igeryoonz